[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16. 두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무한 긍정의 힘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연재를 시작한 지도 얼추 5개월 째로 접어든다. 올해도 쉼 없이 달려온 것 같다. 글에도 쉼표, 느낌표, 마침표가 있듯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내 인생 에서도.
첫 번째 쉼표
1997년 7월 17일, 제헌절. 그날은 나의 첫 번째 쉼표가 찍힌 날로 기억된다. 그 당시엔 제헌절이 공휴일이었다. 인천 사는 등산 매니아 내 친구가 도봉산을 함께 오르자고 전날 전화가 왔다. 특별히 약속도 없고 해서 도봉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
간밤에 비가 와서 인지 등산로도 미끄럽고 바위도 푸석푸석했다. 역시나 연휴라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았다. 친구가 갑자기 ‘리찌’ 잘 하냐고 묻는다. ‘리찌’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대충 암벽등반을 얘기하는 것 같아 “난 모든 산을 잘 탄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암벽 쪽으로 코스를 튼다.
친구의 손과 발 움직임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면서 암벽을 올랐다. 나름 스릴 있고 재밌었다. 이번엔 엉덩이 골 같이 생긴 암벽 두개를 마주 잡고 내려가는 코스이다. 친구가 리찌 시범을 보인다. 난 그 순서대로 따라 하려고 했다. 아뿔싸! 그 친구와 난 기럭지 자체가 다른데 그 친구의 오른 발 포인트에 내가 아무리 뻗으려고 해도 닿지 않는다. 그래서 무리하게 오른 발을 내밀다가 그만 양 손을 놓치고 말았다. 바위에서 떨어진다. 친구가 아래 절벽에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친구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공중으로 솟았다. 시간이 고정된 듯 공중을 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래 큰 나무가 보인다. 팔을 뻗었다. 겨드랑이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나뭇가지가 꺾이며 아래 나뭇가지에 또 떨어지고 그 나뭇가지도 꺾이고 그러기를 서너번, 그리고 아래 나무 밑둥으로 떨어졌다. 아래는 또 70도 가까운 절벽. 용케도 나무 밑둥을 잘 잡았다.
살았다. 영화 ‘람보’에서처럼 절벽 위까지 쫒기던 람보가 울창한 숲이 있는 나무 위로 몸을 던저 탈출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날아서 나뭇가지에 걸려서 속도를 줄였고 결국 살았다. 친구와 난 서로 나무 밑둥을 잡고 웃었다. 난 소리 내어 웃는데 친구의 모습은 웃는 표정인데 목소리가 안들린다. 부상이 나 보다는 심각해 보였다. 이내 위에서 있던 등산객들이 구출하기 위해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제서야 고통이 밀려왔다. 헬기 소리가 들렸고 친구는 헬기에 실려 내려갔다. 내심 나도 헬기로 내려가는 구나 기대했다. 헬기를 한번도 못 타봤기에. 그런데, 난 부상정도가 경미하다고, 헬기 탈 공간도 없다고 산악구조대원과 함께 부축 받으며 걸어서 내려 오란다. 친구는 갈비뼈가 부러져서 경희대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고 난 아현동 부근의 정형외과로 보내졌다. 그리고, 난 7일간 입원했다. 다행인 것은 나뭇가지에 걸린 옆구리 타박상을 제외하곤 큰 상처가 없었다. 하늘이 도운 거다.
두 번째 쉼표
2010년 7월 7일, 중국 상하이로 회사 동료 두 분과 함께 출장길에 올랐다. 매년 있는 글로벌 파트너 미팅 참석차였다. 중국 출장 이틀 전부터 몸살기가 있었다. 난 단순한 몸살로 생각하고 약을 지어서 먹었다. 몸이 괜찮아 지는 것도 같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출장 당일날 새벽부터 몸 상태가 이상해져가고 있었다. 고열과 오한으로 밤을 지새고 오후 다 되어서야 사무실로 나올 수 있었다. 와이프가 꼭 병원 들렀다 출장가라는 말을 뒤로하고 짐을 챙겨 회사 부근 공항터미널로 향했다. 당연히 병원은 시간 관계상 가지 못했다. 와이프의 병원가라는 독촉 전화와 문자에는 갔다 왔다고 대충 둘러대었다.
상하이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한국투자파트너스 상해사무소 소장과의 저녁약속을 위해 호텔로비로 내려왔다. 오한과 기침이 심해졌다. 사전 양해를 구하기 위해 먼저 내려와 오늘 약속 참석이 힘들것 같다고 얘기하고 난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배가 조금 고파왔다. 방안에 있던 바나나와 사과를 하나 먹고 약을 먹었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밤새 너무 추워서 에어컨을 껐다. 온몸이 흠뻑 젖었다. 고열에 시달리다 보니 아침이 금세 왔다. 동료가 아침 먹으러 가자고 연락이 왔다. 아침 먹으러 갈 힘이 없었다. 난 룸 서비스로 먹겠노라고 얘기했다. 점심약속은 정말 가기 싫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미리 잡아 놓은 전 직장 KTB 홍원호 선배와의 약속이라 안 지킬수가 없었다. 고급 딤썸 전문점이었는데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호텔에서 쉬고 싶었을 뿐.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하여튼,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목을 보고 놀랐다. 목이 육안으로도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부어 있었다. 바로 호텔 프론트에 전화해서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내 동료들이 내방을 찾았다. 내 목을 보더니 즉시 모든 일정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방금전에 병원예약을 한 터라 일단 병원 다녀와서 판단하기로 했다. 그게 중국 출장 최대의 오판이 되리라곤 그땐 몰랐었다. 시련의 시작이었다.
병원에 9시 조금 넘어 도착하였다. 예약이 10시 30분이라 1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떨렸다. 심각하게 보였는지, 간호사가 바로 오더니 내 체온을 잰다. 40도가 넘는다. 그 즉시 응급환자로 순서 상관없이 진료를 보게 되었다.
상해국제병원이라 의사들이 영어로 다 의사소통이 된다. 피검사부터 시작해서 소변검사, 초음파 등 검사를 받았다. 그러면서 우선 고열을 내려야 한다고 해열처방을 하기 시작한다. 링거주사액을 꽂는다.
그래도 고열은 계속된다. 의사가 바뀌었다. 또 증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물어본다. 목이 너무 부어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기침도 심해진다. 의사들끼리 얘기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번엔 서양인 의사가 들어온다. 또 이것저것 검사하고 물어본다. 세 명의 의사가 서로 상의한다. 간단히 진료받고 저녁 때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했던 계획이 점점 멀어져 간다. 오늘 저녁 귀국 비행기 예약되었다고 얘기하니 의사는 바로 예약취소 하라고 한다. 지금 공항가면 전염위험이 있어 안되고, 몸 상태도 위험한 상황이라 한다. 그래서, 비행기표는 바로 예약취소 했다.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 붉게 보이던 몇 개의 반점이 점점 많아 지더니 온 몸을 덮었다. 한참 뒤에 의사들이 오더니 보호자에게 전화를 하라고 한다. 그리고, 보호자가 오면 상해 외곽 병원으로 격리된다고 한다. 증상을 물어보니 ‘장티푸스’ 아닌가 의심된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진단을 못하겠다고 한다.
‘장티푸스’라니. 들어는 봤는데 정확히 어떤 질병인지 몰라 와이프에게 전화했다. ‘장티푸스’가 어떤질병인지 검색해 보라고 하고, 상해 외곽병원으로 격리될지도 모른다고 전화로 알려주니 와이프가 울기 시작한다.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며 전화를 끊었다.
보호자로는 같이 출장간 동료 2명이 왔다. 바로 간호사들이 간이침대로 옮기더니 앰뷸런스에 싣는다. 시간은 오후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함께 동승한 동료들과 나, 그리고 운전기사는 모두 마스크로 무장되어 있다. 전염성 있는 질병이라 전염병 전문병원으로 격리 된다니. 유일한 위안은 앰뷸런스 타기 직전 잰 체온이 39.2도라며 오늘 잰 체온 중에서 가장 낮다는 간호사의 말이었다.
덜컹 거리며 앰뷸런스는 한참을 달린다. 이젠 어둡다. 차는 속도를 더 높인다. ‘살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눈을 감았다.
격리수용병원에 도착했다. 바리케이트가 올라가더니 경비가 들어가라는 신호를 한다. 그리고 나를 내려 간이침대로 갈아 태우더니 간단히 수속을 한다. 동료들이 여기 저기 전화한다. 격리병원에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 힘드니 지금이라도 나오라는 중국 지인들의 조언이 쏟아진다. 혹 몰라 상해영사관에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병원 의사는 고열과 함께 간수치도 비정상적으로 올라가서 지금 당장 입원치료 받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라 한다.
앰뷸런스를 타고 입원병동에 도착했다.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너무나 어두웠다. 스산한 분위기. 3층으로 올라갔다. 병실은 많은데 아무도 없다. 형광등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또 눈을 감았다.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의사가 들어온다. 전 병원에서 건네 준 의료기록과 차트를 보더니 팔과 배를 걷어 보라고 한다. 그리고, 종아리와 발바닥까지 살피더니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얘기한다. 중국말로 ‘마전’이란다. 몰라서 다시 물으니 영어로 “Measles”라고 한다. 그 말도 못 알아들어 어리둥절해 있을 때 한국 동료 1명(미군부대-카투사 출신이다)이 마스크를 벗으며 나를 구박하듯 말한다. “야! 홍역이잖아. 마흔 먹어서 홍역 걸리냐?” 그 옆에 있는 동료들도 다 마스크를 벗는다. 장티푸스 일지도 모른다고 해서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 병명을 알게 되니 살 것 같았다.
동료들도 떠나고 이젠 혼자다. 넓은 병실 3층 병동에 나 혼자다. 너무 외롭고 무서웠다. 가만히 있는데 방구가 피식 나왔다.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방구와 함께 약간 분비물이 묻어 나온 것 같다. 몸이 아프니 항문도 제 구실을 못하고 느슨해 졌나 보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 일을 본다. 아뿔싸 휴지가 없다. 하의를 다 벗었다. 방법은 샤워기 밖에 없다. 샤워기로 대충 씻었다. 그런데, 팬티엔 여전히 묻어 있다. 손빨래를 했다. 목도 허리도 아픈데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팬티를 손빨래 하다 보니 약간 울컥해 졌다. 젖은 팬티와 바지를 다시 입고 조금 있으니 간호사가 들어와 환자복을 준다.
그렇게 상하이 격리수용 병동 독방에서 난 죽만 먹으며 혼자 8일을 견뎠고, 병원비는 현금으로 340만원이 들었고, 5킬로그램이 빠진 초췌한 모습으로 7월 16일 무사히 귀국했다. 그것도 돈 없다고 한국 보내 달라고 사정 사정해서 말이다.
이런 두 번의 경험은 나의 인생을 많이 돌아보게 만들었다. 우린 언제 죽을 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현실에 만족하며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될 뿐이다. 좌절을 겪는 것은 다시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일 수 있다. 귀국 후 접한 ‘조엘 오스틴’의 설교와 책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렇다. 무한 긍정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물론 우리 인생이 일정 부분 운에 의해서도 좌우되겠지만, 긍정적인 사고로 살면 보이지 않는 힘이 더 작용하여 절벽에서 떨어질 때도 팔을 뻗어 나뭇가지에도 걸리게도 해주고, 전염병에 걸려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에 꼭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긍정적 사고방식’이다. 회사를 창업하여 성공으로 이끌기 까지 창업자는 수 많은 좌절을 경험한다. 그 좌절 속에서도 창업자는 리더로써 조직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항상 미래를 바라보고, Vision을 얘기하며 긍정의 마인드를 조직에 심어야 한다. 그 근원은 당연 창업자 스스로의 무한 긍정 마인드다. 무한 긍정 마인드가 없으면 창업자 스스로도 이내 지치게 되고 그를 바라보는 조직원들도 당연히 더 지치게 된다. 긍정적 마인드를 계속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는 창업자도 조직원들도 아주 작은 성공을 자주 경험해야 한다. 이것을 실리콘밸리 용어로 풀어보면 ‘Micro Success’이다. 긍정적 마인드가 성공으로 이끌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엔진’이라면 이런 작은 성공들은 그 엔진이 잘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미래에 거대한 가치를 만들 창업자들이 무한 긍정의 마인드로 무장하고 모두 원하는 바를 이뤄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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