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17. 쇼트트랙 넘버3의 행운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2002년 솔트레이크 남자 쇼트트랙 1000미터 결승전이다. 한국의 안현수, 미국의 안톤 오노, 그리고 세명의 선수까지 총 다섯명의 선수들이 결승선 출발점에 섰다. 한 바퀴 두 바퀴는 다들 비교적 여유있게 돈다. 마지막 한 바퀴 반을 앞두고 안톤 오노가 치고 나온다. 무리하게 치고 나가면서 선두권들 달리고 있던 안현수와 부딛친다. 이내 1등부터 4등 까지 한꺼번에 다 쓰러진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호주의 스티븐 브래드버리가 손을 들고 여유 있게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일들도 종종 벌어진다. 꼴찌로 달리고 있다 가도 기본기 충실하게 자기 역할 및 임무를 충실히 하다보면 이런 행운이 올 수도 있다. 내가 처음 IDG에 들어왔을 때 난 파트너도 아닌 일개 종업원 신분이었다. 파트너 두분을 모신 넘버3. 난 그저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될 뿐이었다. 난 파트너 두 분의 뒤를 이어 세번 째로 트랙을 내 페이스 유지하며 열심히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눈 앞 두 분이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행운이 나에게 왔다.
첫 느낌은 두려웠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쳐나갈 지. 가뜩이나 영어도 딸리는데. 우선 여러가지 행정적인 절차부터 마무리 지어야 했다. 사무실도 터가 좋은 강남역 삼성전자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동안 격주간 보내드렸던 스타트업 및 VC관련 뉴스레터 ‘IDG VC Update’를 통해 내 소식을 전했다.
축하해 주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어느 VC에 있는 친구는 잘난 체 한다고 독설과 함께 구박을 엄청 해댄다. 독기가 생겼다. ‘그래, 두고봐라!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상황은 만들어 가라고 있는 것이니깐’
내가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벌리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준비가 착실히 잘 되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충분히 부딛쳐 볼 만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중요한 판단을 할 때가 몇 번 있다. 그 판단엔 항상 책임이 따른다. 신중한 판단을 내린 이후에는 무모해 보일지 몰라도 적극적으로 도전해 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말한다 맨땅에 헤딩하면 머리가 깨진다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맨땅에 헤딩을 자꾸 하다보면 맷집도 생기고 때론 아주 행운처럼 쿠션 좋은 땅에도 헤딩할 기회가 오기도 한다. 가장 나쁜 것은 헤딩도 못해보고 지레 포기하는 것이다.
스타트업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고집, 끈기, 근성이 필요하다. Tenacity!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근성도 기회를 잡기 전에 쓸데 없이 부릴 필요는 없다. 진정으로 인생의 기회라고 느낄 때 무모하게 느껴지더라도 이런 고집과 끈기 그리고 근성을 부려야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즉, 기회는 하늘에서 툭툭 떨어지는 데 준비하고 있는 자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기회라는 것은 때론 묘하다. 가장 힘들고 어렵고 전혀 기회처럼 보이지 않는 위기일 때가 종종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설립 후 3년 동안 내 놓는 서비스 족족 말아먹다 카카오톡 하나로 일어선 카카오나, 한 때 해외에서 ‘오븐브레이크’란 모바일 게임으로 인기를 구가하다 어려움에 직면해 직원들 구조조정까지 하며 마지막 남은 소수의 인력으로 거의 마지막으로 국내 런칭한 게임이 대박난 쿠키런의 데브시스터즈나, 온라인 게임의 쇠락(?)에서 기가 막히게 모바일로의 전환을 일궈낸 위메이드나 모두 위기를 기회로 만든 회사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무척 많다.
간과하는 것은 그런 위기상황에서 운이 좋아 다 성공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물론 운도 상당 성공에 영향을 주는 요소이긴 하다. 하지만, 그 성공을 위해 카카오는 치열하게 Web 2.0에서 경험을 축적했었고, 데브시스터즈는 국내에 모바일 게임시장이 열리기 전에 험한 외국시장에서 치열하게 모바일 게임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고, 위메이드도 온라인게임의 노하우에 모바일 DNA를 잘 접목했었다. 즉, 준비된 자에게 위기가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그 기회가 올 때 까지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스타트업이 버티기 위해서는 월 비용(Burning Rate)을 수익이 발생하여 손익분기점(BEP)을 넘기기 까지 극도로 줄이거나, 아님 그때 까지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실탄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놓을 수 있으면 된다.
데브시스터즈가 쓰라린 구조조정을 통해 월비용을 극도로 줄인 경우라면 충분한 실탄을 지속적으로 마련하며 기회를 엿본 경우는 카카오이다. 통상 구글, 페이스북, 카카오처럼 플랫폼을 지향하는 경우에는 BEP 도달 까지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자금도 많이 필요로 한다. 플랫폼 사업의 경우는 투자자들도 큰 시장이며 투자수익도 커질 수 있다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투자할 의지가 있다. 반면, 비 플랫폼 사업이라면 지속적으로 투자유치를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투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받아 놓고 가급적 월비용을 줄여 생존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봐야 한다. 그 기회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그 기회를 움켜잡아야 한다. 이게 스타트업의 성공 법칙 아닐까?
오늘 글은 유난히 두서 없다. 그것은 VC에서 나의 인생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 탓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 같은 벤처캐피탈도 스타트업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한 스타트업이 성장해야만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투자 스타트업, 난 그것을 즐기며 열심히 하고 있고. 아무쪼록 대한민국 모든 벤처캐피탈들이 그들이 투자한 스타트업들의 성장과 함께 지속 성장할 수 있길 기원해 본다.
[divide]
- 연재를 시작하며
- KTB 민영화, 그리고 한편의 詩
- 벤처캐피탈 입문
- 미뤄진 인생계획
- 영화투자의 시작
- 벤처투자의 기초
- 닷컴 그 늪에 빠지다.
- 글쓰기, 그리고 홍보팀으로 버려지다
- 벤처캐피탈과 사주
- 스타트업과 인센티브
- 네 번의 청혼, 한 번의 승낙
- 창업자의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
- 영화투자와 M&A의 갈림길에 서서
- 길거리 캐스팅, 그리고 IDG
- 벤처캐피탈의 자녀 금융교육법
- 두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무한 긍정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