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19. 벤처캐피탈과 겸손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2001년 초 내가 KTB네트워크 엔터테인먼트팀에서 영화투자를 하던 시절 내 밑으로 경력직이 한 명 들어왔다. 바로 최찬석. 경영학을 전공하고 모 금융회사에서 2 ~ 3년 정도 경력을 쌓은 친구였다. 직장생활 첫 쫄따구(?)라 나도 기대를 많이 했다. 투자 심사보고서도 쓰고 업체 실사도 하고 그 친구를 매번 데리고 다녔는데 그 당시 이 친구가 회계 및 재무지식이 너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박을 좀 많이 했다. 대학 다니면서 이런 거 안배웠냐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는 셈이다.
그렇게 구박 받던 그 친구가 퇴근 후 회계학원도 다니고 나 모르게 시험 준비도 하더니 2001년 2학기 고려대 MBA에 붙어 버렸다. 순간 당황. ‘난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 친구가 다니고 있는 고대 MBA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관건은 토익시험을 다시 공부해서 제출할 마음의 여유와 자신이 없었기에 영어 필기시험 통과가 필수적이었다. 그 친구도 그렇게 필기시험을 보고 붙었으니깐. 그래서, 최찬석으로부터 영어시험 노하우도 전수 받고 그 친구가 공부한 시험문제집도 빌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시험과 면접을 보았다. (현재 최찬석은 KTB투자증권에서 인터넷/게임 업종 잘나가는 애널리스트이다)
영어시험은 정말 어려웠다. 생전 처음 보는 학술용어들로 이루어진 시험, 내가 영어를 배웠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면접은 더 가관이었다. 마케팅 전공을 지원했는데 면접 때 교수가 한 질문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음… 경제학은 (주절주절), 경영학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죠. 아무래도 그 깊이나 철학적인 측면에선 경제학과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난 떨어졌다. 찬석이도 붙었는데 내가 떨어지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던 와중 학교 선배인 광희형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형, 나 대학원 좀 다니고 싶은데 고대 지원했다가 그만 떨어졌어요”
“그래? 무슨과 지원했는데?”
“마케팅요”
“너 미쳤니? 벤처캐피탈이 무슨 마케팅 전공이냐? Finance 전공해야지.”
“아, 그래요?”
“내가 한대에서 재무관리 전공했는데 교수님께 잘 얘기해 둘 테니 거기 한번 지원 해봐라”
“넵, 고맙습니다. 형님”
그래서 난 2002년 1학기부터 한양대 경영대학원 재무관리전공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대학 졸업한 지 5년만에 다시 대학 캠퍼스로 돌아오니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벤처캐피탈에서 선배들로부터 주먹구구 식으로 배워온 재무에 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다 보니 먼가 틀도 잡혀가는 것 같고 공부에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대학시절 인생공부 한다고 학문을 너무 등안시 했던 탓도 클 것이다. 그때 난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삶이, 만남이, 책이 다 공부가 될 수 있지만 때론 학교 같은 제도적 장치들도 공부에 있어 필요하다. 다시 다닌 학교에서 과제 걱정, 시험 걱정, 발표걱정 등등 이런 걱정거리들이 오히려 나에겐 대학시절 미쳐 몰랐던 낭만처럼 느껴졌다. 나이가 좀 있으신 형님들부터 삼심대 초반인 나까지 다 함께 기말시험 후 뒷풀이도 하고 교수님 호박씨도 까고. 너무나 신선했다.
재무의 기본 원리, 선물/옵션, Valuation, 투자론 등도 재밌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가고 논문학기만 남았다. 논문은 당연 벤처캐피탈 관련 내용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시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때 마침 튜브인베스트먼트(현 HB 인베스트먼트)에서 코스닥 상장사 보이스웨어 인수를 막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2004년 3월 초에 인수계약을 하고 3월말에 주총과 함께 경영진을 변경하고 4월초부턴 실제 경영에 참여를 해야 하기에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하며 너무 나도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논문 제출기한은 5월말. 그런데 벌써 4월 초이다. 최종연 지도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 시작해도 논문완성이 가능한지 여쭤보았다. 교수님은 시간은 충분하니 한번 열심히 해보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번 기회 놓치면 석사는 영영 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용기를 얻었다.
4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논문작업에 들어갔다. 바쁜 회사일을 하면서도 늦은 퇴근 후 하루 세 시간씩 자면서 한 달 반을 논문에 매달렸다. 그리고, 2004년 5월 26일(석가탄신일) 새벽 6시 먼동이 터올 때 석사논문을 탈고 했다. 그리고, 네시간 정도 자고 압구정 이태리 레스토랑 ‘안나비니’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한 달 반 동안 잠도 못 자서 눈도 팅팅 붓고 이발도 제대로 못해 꾀죄죄한 모습, 그리고 갈라 터진 입술. 이런 모습으로 처음 만난 여인이 바로 현재의 와이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2009년 어느 날, 아는 분 회사에 놀러 갔다. 그런데 그 분 상사로 계신 분이 벤처캐피탈로 최근에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그 상사분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박사논문 좀 주실 수 없냐고 여쭤보았다. 그 분이 흔쾌히 논문을 건네 주셨다. 그것이 내가 박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3년 코스웍을 마치기 위해서는 와이프의 이해가 급선무 였지만 둘째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와이프도 어렵사리 허락해 주었다.
다시 2012년 4월. 박사논문 쓰기 막바지이다. 두 달 가까이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투자도 3건 승인냈고, 투자기업 주총도 쫒아다니고, 매주 쫄투도 찍고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2월부터 잠 못자고 써온 논문. 하루 서너시간 자면서 두달 내리 달리다 보면 체력도 바닥나는 법이다. 그날도 새벽 네시쯤까지 논문 쓰다 8시쯤 일어난 것 같다. 코스웍은 마지막 학기. 4월 14일 토요일 오전 수업.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져 온다. 비몽사몽간. 교수님의 강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 쉬는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는데 정신이 몽롱한게 영 이상하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네, 이희우 입니다”
“이희우씨죠? 여기 **경찰서인데요. 혹 지난 주 지갑 잃어 버리셨죠?”
(속으로 뜨끔하며) “아, 네. 잃어버렸습니다”
“근데 그 잃어 버린 주민등록증으로 **은행에 대포계좌가 하나 열렸어요. 알고 계셨나요?”
“그럴리가요?”
“아니 이 사람. 지금 그 계좌가 범죄용으로 사용된단 말이얏!, 어이 김형사 자료 좀 갖고 와바”
“아. 넵.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지금 컴퓨터 갖고 있지? 그럼 바로 내가 불러주는 사이트 접속해봐. **경찰서 사이트인데 거기서 계좌 신고하고 비밀번호도 변경하라구”
“사이트 불러보세요”
걸려들었다. 육체도 정신도 피폐해져 있던 논문 쓰던 말미에 보이스피싱에 걸려버렸다. 그리고 12백만원을 날렸다. 개콘 ‘황해’ 코너에서처럼 어설픈 수법에 당했다. 그래서 난 ‘황해’ 코너가 생긴 이후 개콘을 보지 않고 있다. 하여튼, 서초경찰서에 신고하러 가서도 형사한테 구박 받았다. 당한 수법이 예전에 쓰던 구식 수법이란다. 쩝! 와이프도 구박한다.
“박사될 사람이 보이스피싱이나 당하구. 으이구 잘한다. 당장 나가버렷!”
“미안해. 나도 힘들어. 걍 가만히 놔둬.”
“그 돈 나한테 줬으면 애들 좋은 거라도 사줬을 텐데. 쯧쯧 헛 똑똑이얏! 헛 똑똑”
“…”
경영학석사로 돈 관련 내용을 다루는 재무관리(Finance)를 전공했고, 직장생활 업무도 돈을 다뤄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을 하고 있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돈관리는 철저하다고 자부하던 내가 보이스피싱 사기에 당하니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아니 부끄럽다는 표현 보다는 그 순간 내가 너무나 밉고 싫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다. 그것도 최고의 지성이라는 경영학박사 되려는 박사논문 쓰는 와중에 당하다니.
이런 사건 당하고 계속 논문을 쓰려니 도저히 울화가 치밀어 논문이 써지지 않았다. 그런데 참아야 한다. 끝은 봐야 하니깐. 그게 더 힘들었다. 그래도 한 달을 더 참고 논문을 썼고 학술지에 보낼 수 있었다.
보이스피싱을 통해 또 한번 겸손을 배웠다. 중국 공산당 모택동 주석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谦虚使人进步,骄傲使人落后(겸손은 사람을 진보시키고, 교만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맞는 말이다. 만약 보이스피싱 없이 박사를 땄다면 난 더 교만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스피싱 사건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다 하늘이 벌준 거구나’ 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벤처캐피탈도 사업도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항상 겸손해야 투자도, 사업도, 인생도 발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항시 겸손한 자세로 인생에 임해야 한다.
지금 당장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 잘되는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만한 자에게는 적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적들이 많이 생기면 인생도, 사업도 꼬일 수 있다. 그런데,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지내다 보면 친구가 많아 지고 그런 친구가 많아지다 보면 언젠 가는 그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인생도 사업도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보이스피싱이 나에게 준 교훈이다.
남들이 보면 내가 잘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경영학 박사에, 벤처캐피탈 대표에, 쫄투 진행자에. 아니다. 난 단지 보이스피싱으로 천이백을 날린 멍청한 놈이다. 그리고 항상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 혹 본인이 미워져 힘들어 하는 창업자들이 있다면 내 경우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조금이나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div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