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22. 잠깐 쉬어 가자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올 상반기도 나름 열심히 달려온 것 같아서 나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사실 휴가라 해봤자 애들 데리고 하루 종일 놀아줘야 하는 고역(?)도 뒤따르긴 하다. 달라지는 것은 없단 얘기다. 그래도 이메일 답장도 안하고, 전화도 안 받고 업무에서 벗어나니 맘은 편했다.
양평에서 냉면을 먹는 것을 시작으로 고향으로의 휴가여행은 시작되었다. 동해안 바닷가 삼척. 나에겐 고향인데 와이프에겐 시댁이다. 와이프는 종종 “시댁가는 게 휴가냐?” 라며 나를 구박 한다. 그러면서도 고향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와이프가 고맙다.
업무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업무와 휴식이 별 차이가 없다. 늘상 관심있는 스타트업 업계와 벤처캐피탈 얘기면 그게 취미며 휴식이다. 그래서 항상 즐겁다. 책도 보고 그 동안 내가 잘 보지 못했던 것도 멈춰서 여유를 가질 때 잘 보이곤 한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1993년으로 기억난다. 벚꽃이 활짝 핀 4월 중순 무렵이었는데 난 그때까지 벚꽃이 핀 줄도 모르고 머리를 푹 숙이고 다니다가 남들이 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어 그제서야 벚꽃 핀 사실을 알았다. 부끄러웠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그런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활짝 핀 아름다운 꽃을 땅바닥만 보고 다니느라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뭐가 그리 바쁘다고. 뭐가 그리 근심이 많다고.
그래서 가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사는 것이 좋은 듯 하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그 해의 그 계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 계절의 변화를 보며 아름다운 순간을 찰칵찰칵 사진 찍듯이 머리 속에 넣어 보자. 그리고 힘들 때, 괴로울 때 마다 그 기억들을 꺼내서 되새겨 보자. 세상은 우리가 열심히 살기에 충분히 감사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가끔은 나도 이런 시라도 써서 그때의 느낌을 되살리곤 한다.
벚꽃 길
눈부신 햇살도
산들산들 바람도
흩날리는 꽃송이도
맘껏 반겨주는
오늘 아침
벚꽃 출근 길
2013.04.26 씀
시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창의성을 얘기할 때 시를 많이 읽어보란 얘기를 참 많이 한다.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시란 무엇인가? 문학작품 중에서도 가장 축약된 언어가 사용된 작품이 아니던가? 예술작품 중 가장 축약된 이미지가 담긴 그림의 가치를 많이 쳐주듯이 문학에서도 시가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에 많은 이치들이 함축되어 들어가 있다 보니 그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은유와 풍자를 보면 ‘아하’ 라는 감탄사가 터지곤 한다. 시인들은 사물의 외면보다는 내면을 보려고 노력하다 보니 내면을 이해하는 능력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시를 좋아하고 가끔 시를 쓰기도 한다.
쉬어가는 것은 중요하다. 사업도 거침없이, 쉼 없이 달리다 보면 방향성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 달려오던 관성에 따라 계속 가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경영진이 너무 쉼 없이 달리는 경우에는 오판을 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가끔은 쉬면서 머리도 맑게 하고 진행되어온 것들도 점검하고 방향성도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머리를 맑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시나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다. 그럴 때 난 내가 안쓰던 감각이 살아남을 느낀다. 가수 이적이 SBS 힐링캠프에서 한 말처럼 리프레쉬가 필요할 때 외국어 서적을 읽으면 예전에 안썼던 뇌의 한 부분을 쓴 것 같아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다 라는 느낌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 코딩이니 린스타트업이 고객이니 마케팅 수치니 이런 것에 너무 골몰해 있는 창업자들은 뇌의 다른 부분을 자극해서 창의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평소에 잘 읽지 않던 책이나 잘 하지 않던 그림 감상이나 오페라 같은 것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휴식은 꼭 필요하다.
쉬다 출근하려니 온 몸이 뻐근하다. 매주 연재하던 글도 그 감각을 끌어올리기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부작용인가? 그래도 이런 부작용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작용일 듯. 이번 주는 워밍업 시간으로 삼아야 겠다. 다시 12월까지 열심히 달려야 하니 서서히 발동을 걸어야겠다.
마지막으로 정신건강(?)에 좋은 시 한편 소개한다. 일본 어느 선승이 쓴 시인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이다. 뭔가 번뜩이지 않는가?
술독
내가 죽으면 술독 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
[divide]
- 연재를 시작하며
- KTB 민영화, 그리고 한편의 詩
- 벤처캐피탈 입문
- 미뤄진 인생계획
- 영화투자의 시작
- 벤처투자의 기초
- 닷컴 그 늪에 빠지다.
- 글쓰기, 그리고 홍보팀으로 버려지다
- 벤처캐피탈과 사주
- 스타트업과 인센티브
- 네 번의 청혼, 한 번의 승낙
- 창업자의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
- 영화투자와 M&A의 갈림길에 서서
- 길거리 캐스팅, 그리고 IDG
- 벤처캐피탈의 자녀 금융교육법
- 두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무한 긍정의 힘
- 쇼트트랙 넘버3의 행운
- 어떻게 살 것인가?
- 벤처캐피탈과 겸손
- 초대받지 못한 파티, 그리고 쫄투의 인연
- 창업스쿨을 열다 – 린스타트업 방식의 접근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