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25. 사업계획서 작성, 모방과 훔치기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이번 주 월요일 은행권청년창업재단(D.Camp)에서 ‘쫄지마! 창업스쿨’ 강의를 했다. 투자유치를 위한 사업계획서 작성 및 Pitch 라는 제목으로. 2시간 동안 강의를 하다 보니 목도 쉬고 기진맥진해졌다. 비록 내 몸은 피곤해 졌다 할지라도 졸지 않고 끝까지 강의에 집중하던 모습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끝나고 하는 조촐한 찻집 뒷풀이도 흥겹다. 이젠 뒷풀이 고정멤버가 생긴 듯 하다.
사업계획서 작성 관련 강연을 할 때 내가 항상 사용하는 문구가 있다. 바로 피카소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말인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이다. IT업계 최고의 혁신적 기업가 스티브 잡스도 이 말을 자주 애용했었다.
이것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피카소의 불후의 명작 ‘아비뇽의 처녀들’ 탄생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도 피카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온 작품은 아니다. 천재 화가인 그도 그가 존경하고 배우려 노력했던 ‘마티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바 있다. 마티스의 ‘인생의 행복’과 ‘아비뇽의 처녀들’의 구성과 색채가 비슷한 것을 보더라도 피카소가 마티스로부터 모방한 것은 틀림 없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은 뭔가 거칠고 각진 느낌이 있다. 그는 마티스의 왜곡된 완만한 선, 원색에 가까운 색채와 특이한 구성에 아프리카 조각상의 거친 선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한 것이다. (미국 콜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윌리엄 더간 교수의 ‘전략적 직관’ 일부 인용)
즉, 그는 평면의 회화와 입체의 조각 느낌을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그림의 세계를 연 것이다. 그래서 그가 천재 화가로 인정 받는 것이고 그의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받는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어느 연배가 조금 있으신 수강생이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런 것을 받을 때 마다 힘이 절로 나고 보람을 느낀다. 보낸 이의 허락을 받진 않았지만 내용이 좋아 익명으로 한번 실어본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box]제목: 월요일 강의 소감
보낸사람: 사이먼 <*****@empas.com>
받는사람: *****@idgvk.com
(1) 월요일 강의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진리)을 말씀하셨는데 참가자들이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2) 바로 이 말이죠….”Copy, Steal”
(3) 최근에 ‘카피캣’, ‘모방의 경제학’, ‘베끼려면 확실하게 베껴라'(?) 등등 책도 몇 권 나온 것 같습니다만..
(4) 학생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니 아이디어 만들라고 고민하지 말고, 외국(미국)에서 베낄 게 뭐가 있는지 빨리 찾아보라고 하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5) 온갖 Case 들을 말해줘도 말이죠 ….Steve Jobs, Bill Gates가 얼마나 많이 베꼈는지 아느냐…티켓몬스터도 미국 Groupon 을 그대로 베낀거다…등등
*** 올림.[/box]
과연 이 분처럼 모든 수강생들이 모방과 훔치기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했을까? 만약 이해 못했다면 다 전달을 제대로 못한 내 책임이다. 혹 몰라 여기서 부연 설명해 본다.
모방과 훔치기는 소유권이 다르다. 모방(Copy)은 그 저작권(Copyright)이 아직도 모방해온 상대방에게 있다. 즉, 표절이다. 반면 훔치는 것은 그 소유권이 나에게로 넘어온다.(비록 불법적, 일시적 이지만) 이게 중요하다. 나에게 넘어온 소유권에 다른 것을 결합하여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훔친다는 개념이다.
아마도 피카소가 감동 받으며 본 아프리카 조각상을 조각한 조각가도 거친 선의 조각상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 지 미쳐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만들고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해 그 가치를 알아본 스티브 잡스에게 넘긴 제록스처럼 말이다. 피카소는 주인조차 알아채지 못한 그 거친 선의 느낌에 친구 마티스의 화풍과 결합하여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했고,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로부터 헐값에 사드린 GUI를 이용해서 맥킨토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만들어 냈다. 그 맥킨토시의 GUI를 또 빌게이츠가 윈도우로 베끼고. 또 더 멋진 놈들이 그걸 베껴가겠지만.
그렇게 돌고 돈다. 그냥 막 도는 것 같지만 그 가치를 알아본 놈들 사이에선 계속 돈다. 사업계획서 작성, 비즈니스 모델링도 다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그래서 난 사업계획서 작성시 반드시 자신이 하려는 사업과 유사한, 아니면 그 분야에 성공한 기업의 사업계획서를 훔치라고 말한다. 훔쳐서 빨리 다른 뭔 가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라고.
강연 얘기로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다. 그 분에 추가해 다른 몇 몇 분들도 강의 피드백을 주었다. 모두 소중하고 감사드린다. 다만,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 지고 가을이 온 것 같아 감상에 젖어 강의 오프닝에 읽어 준 시(詩)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어 약간 속상하다. 그것도 강의의 연장인데. 스타트업도 오래 살아남아야 기회가 온다고 얘기한 건데. 그 속상함을 내 글 말미에 살짝 실어 본다. 물론 이 시에 쓰인 중요한 문구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오는 말이지만 ‘정호승’ 시인도 살짝 가져와 멋진 시로 재창조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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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 정호승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 물결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는 것을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것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 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이 햇살에 빛나기 때문이다
정호승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창비시선 88) 중에서[/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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