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작년 이맘때다. 박사논문이 최종 종심에서 통과되었다. 끝나고 심사위원 교수님들과 한 중식당에서 와인을 한 잔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대표, 근데 논문 주제를 왜 그걸로 정했나?”
“아, 네. 제가 벤처캐피탈에 있다 보니 벤처캐피탈이 국내에서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외국에선 벤처캐피탈이 투자하면 투자받은 기업의 내부 프로세스도 개선시키고 경영 및 회계 투명성도 제고 되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어떤지 살펴보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 결과가 미국의 경우와 정 반대로 나와서 저도 당황했습니다.”
“맞아. VC 업계에 있으면서 VC업계의 치부를 드러낸다? 재밌기도 하지만 업계 대표들한테 돌 맞는 거 아냐?”
“그러게요. 그래서 논문 내용 발설 안하고 조용히 지내려구요.”
그렇게 1년이 흘러갔다. 이젠 내 논문 내용도 알릴 때도 된 것 같다. 돌 맞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내용을 알림으로써 우리 업계도 좀 더 성숙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논문 내용은 대략 이렇다.
벤처캐피탈은 기술기반 초기기업의 성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본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벤처캐피탈은 벤처창업 생태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온 것도 사실이다. 나의 연구는 벤처캐피탈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기존 연구에서 주목하였던 벤처캐피탈의 순기능 역할 규명보다는 국내 시장에서 벤처캐피탈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순기능 외에 역기능은 없는지 밝히고 있다면 해결방안 및 정책제언을 하는데 연구의 목적을 두었다.
나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보면 벤처캐피탈의 투자는 투자기업으로 하여금 확실히 조기에 기업공개 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현상은 벤처캐피탈이 단독으로 투자했을 경우보다 공동으로 투자했을 때 더 크게 나타난다. 벤처캐피탈의 투자대상은 주로 기술기반 고성장 기업이며(PBR이 높음), 미래의 수익성(영업현금흐름)이 높은 기업이다. 벤처캐피탈은 이런 기업에 투자를 한 후, 조기에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투자기업의 이익조정을 부추기며 결과적으로 기업 투명성을 저하시킨다. 반대로 얘기하면, 투명성이 낮은 기업들이 오히려 더 많은 벤처캐피탈의 자금을 끌어들이고 조기 IPO를 위해 이익을 조정할 가능성이 커진다. 코스닥에 신규 상장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기업공개 이후 실적이 저하되고 주가도 하락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도 조기 기업공개를 부추기는 벤처캐피탈의 책임도 일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가? 나도 투자하고 나서 빨리 회수하기 위해서 얼마나 투자기업을 부추겼던가? IPO를 앞두고는 이익을 섹시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살짝(?) 맛사지 한 적은 없었던가? 그리고 상장하자마자 또 얼마나 투자기업의 주가 하락을 맛 보았던가? 많은 반성이 되었다. 그게 비단 벤처캐피탈의 때문이라고 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벤처캐피탈이 투자한 기업의 경영투명성이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 받지 못한 기업들보다 나쁘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젠 우리 업계도 성숙해져야 한다. 조기에 회수하기 위해서 투자기업의 실적을 압박하게 되면 그게 투자기업의 신뢰도 저하 뿐만아니라 결국 벤처캐피탈의 신뢰도도 저하 시킨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IPO에 의존하는 회수시장(Exit Market) 구조도 다변화 되어야 하지만, 먼저 벤처캐피탈 스스로 변해야 한다. 조합(펀드) 결성 규모확대를 통한 양적 성장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투자기업의 질적 성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연구결과처럼 벤처캐피탈은 투자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조기 IPO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벤처캐피탈 임직원에 대한 윤리교육 강화, 투자기업의 회계 독립성이 유지될 수 있는 회계법인의 선정 등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벤처캐피탈 스스로 성과에 대한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성과에 대한 조급함은 벤처캐피탈 펀드에 투자하는 유한책임조합원(Limited Partner)의 투자성향에 의해 좌우되는 바가 큰데, 벤처캐피탈은 가급적 장기간 인내할 수 있는 유한책임조합원으로부터 자금을 모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어려운 숙제와 같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국내 유한책임조합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부의 모태펀드와 공공적 성격의 유한책임조합원의 정책변화도 수반되어야 한다.
국내 벤처캐피탈 펀드의 대부분은 한국벤처투자가 운영하는 모태펀드의 지원으로 결성된다. 즉, 모태펀드의 자금을 운영하는 한국벤처투자가 표준으로 작성한 조합규약에 의해 펀드의 운용방법, 운용기간, 성과측정, 운용성격 등이 결정된다. 국내 벤처캐피탈들의 IRR 수익률 대비 낮은 원금대비배수(Multiple)는 내부수익률(IRR)으로만 국내 펀드의 투자성과를 측정하는 이유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실제로 2000년 이래 해산조합의 수익률(IRR)이 가장 높았던 2009년도(IRR 22.46%) 해산조합의 경우에도 원금대비배수 성과는 1.25배의 낮은 수준에 머문바 있다. 원금대비배수(Return Multiple)를 펀드 투자성과 판단지표로 사용하는 대부분 외국의 벤처캐피탈 펀드와는 달리 국내 벤처캐피탈 펀드들은 IRR을 성과지표로 사용하기 때문에 회수기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단기간에 투자회수가 가능한 후기기업 위주의 투자를 늘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국내에서 2011년의 후기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탈의 투자비중은 2004년 13%에서 크게 늘어난 44%를 차지한 바 있다. 따라서, 우선 조합표준규약으로 지칭되는 모태펀드의 규약 중 성과판단 지표를 IRR 기준에서 원금대비배수 지표로 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투자 받는 기업의 입장에서도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에 목표를 두어야지 코스닥 시장 상장에 목표를 두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회계기준을 높여서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 일관성 있는 회계정책을 고수해 나가야 한다. 코스닥 시장을 관할하는 한국거래소에서도 상장 직전년도와 그 전년도를 중심으로 코스닥 예비상장기업의 재무제표를 철저히 분석해서 이익조정 가능성이 큰 기업을 걸러낼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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