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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35. 인생 40대, 다시 디지털 노마드 정신이다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1780년 음력 6월 연암 박지원은 압록강을 넘어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갖는다. 한 여름의 무더위를 뚫고 그해 10월 돌아올 때까지 연암은 그 치열하면서도 해학이 번뜩이는 여행의 기록을 글로 남긴다.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2014년을 맞아 첫번째로 읽은 책이 바로 이 ‘열하일기’이다. 40대 중반의 연암이, 부도 명예도 없이 우울한 심정으로 – 마치 40 중반으로 다가가는 나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다 – 사신단의 정식 수행원도 아닌 삼종형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갖는다. 새로운 세계, 낯선 길,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연암은 본인의 시야를 넓힌 것은 물론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을 남긴다. 별 직업도 없고 빈둥대던 40대 중반의 위기에 처한 연암에게 사신단 일원이 된 것은 그에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큰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 내가 올 한해 동안 곱씹을 화두이다. 노마드, 즉 유목민이다. 특별한 거처 없이 정처없이 떠도는 유목민. 그래도,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부딛치고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그게 바로 유목민 정신이다. 그런 유목민 정신이 있었기에 징시스칸의 군대는 단출했으나 속도가 있었고 결국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 연암을 통해 배우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런 정신이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 인 듯 하다. 조직이 단출하면서도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급변하는 모바일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자세여야 할 터.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도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민과 같다. 안정적인 직장이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다. 설사 안정적인 직장에서 정년퇴직 시까지 잘 지냈다고 하더라도 평균 수명의 확대로 퇴직 후 30 ~ 40년 가까이 일 없이 지내는 것도 고역이다. 조기에 퇴직하는 경우는 더 암울하고. 그럼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것인가?

평생 직장의 개념은 없어졌지만 평생 직업(일)은 있는 것 같다. 죽을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일과 함께 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우문(愚問)이다. 현답(賢答)은 ‘왜 사느냐’를 먼저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문과 현답을 얘기하지 전에 왜 사는지를 깨쳐 아는 이라면 그 근간이 되는 정신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한 번 고민해 본다.

이런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열하일기’에서 찾은 것 같다. 사십 대 중반의 연암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이 사람이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여주는 허세 보다는 실질 본모습을 중시했던 문인이었다. 그랬기에 실학의 거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사십 대 중반에 도발한 청나라 방문 경험이다. 그냥 편하게 집에서 주는 밥이나 먹으며 책 뒤척거리며 살았으면 연암은 그저 그런 인물로만 남았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9년 전 이십 대 초반에 나는 홀로 배낭을 매고 중국으로 떠났다. 어학연수를 빙자한 도발이었는데 학교 등록도 없이 무턱대고 서울 하숙집의 모든 짐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비행기표도 편도로 끊어서 말이다. 1995년 1월, 홀로 도착한 북경은 너무나 추웠다. 북경어언학원에 다니던 고등학교 선배에게 대충 편지로 북경 간다고 연락한 게 전부였으니. 내가 아는 것은 그 형이 다닌 다는 학교 뿐. 그런데 그 넓은 중국에서 그 형을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그래서 그냥 개념 없이 찾아간 북경어언학원, 학교 주위를 한참 서성거리다 배고파 들어간 식당, 헐레벌떡 먹을 것을 넘기다 자전거 타고 가는 선배형을 본다. 그렇게 만났다. 그런데 학교등록은 요원한 일. 남자가 칼을 빼 들었는데 이 상태로 한국엔 죽어도 돌아가기 싫고. 그래서 다시 열 몇시간 기차를 타고 청도(Qingdao)로 넘어 온다. 거기서 과 선배형을 만나 비자도 연장하고 숙소도 구하고 무엇보다 학교 등록도 하고.

유학원도 사전 입학증명서도 없이 그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날아간 중국에서 그렇게 난 1996년 1월까지 1년을 견딜 수 있었다. 막상 떠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떠나면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친구들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대부분은 도와 준다. 안 도와주면 다른 이에게 물어보면 되고. 말 한마디 못했던 연암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눠 열하일기를 남겼던 것처럼 나의 중국생활의 처음도 필담에 손짓발짓이 전부였으니. 안하니 못하는 거고 해보면 다 할 수 있거늘. 현대그룹을 만든 정주영 회장님도 “그거 해보기나 했어?” 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세상은 필연 보다는 우연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는 듯. 하나 하나의 우연이 잘 연결되면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도 가능해지고 그러다 보면 자신도 많이 바뀌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터. 스티브잡스가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말한 ‘점들 연결하기(Connecting the dots)’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18년 전 오늘(1996년 1월 6일) 사랑하는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다. 난 그때도 북경에 있었다. 북경 변두리 허름한 호텔 바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김광석의 비보를 들었다. “광석이는 왜 그리 빨리 세상을 떠났누” 라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 대사처럼 그는 너무나 빨리 세상을 떴다. 안녕들 못한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짐을 남겨두고 말이다.

오늘 글은 자꾸 옆으로 샌다. 김광석의 기일이라 그런가? 다시 디지털 노마드로 돌아가자. 이십 대 초반 젊었을 때 난 중국이라는 큰 세상에 홀로 던져 졌다. 그리고 열심히 그 세상을 헤쳐 나왔다. 그리고 근 20년이 지난 지금 난 다시 유목민 심정으로 돌아간다.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 모바일 시대에 유목민 정신으로 무장하고 말이다. 그래야 앞을 헤쳐나갈 수 있으려니. 뭔가 딸린 게 많고 신경 쓸게 많다면 급변하는 시대에 따라가지도 못할 듯. 설령 따라간다 하더라도 성공하지는 못할 듯. 미리 앞서 나가기 위해선 좀 더 단출하게, 선택과 집중을 하고, 속도감을 높여야 할 듯. 다시 맞을 이십 년을 바라보며.

이런 기대를 가지고 열하일기를 읽기 시작했으나 여행 중반부에 그가 쓴 일신수필을 보면 책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이런 연유로 오히려 연암에게 더 정감이 간다고 하면 거짓말일까. 그래서 한 구절 실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노마드 정신은 물론 ‘열하일기’ 곳곳에 나타난다. 역시나 한 해를 여는 책으로 작년의 ‘승려와 수수께끼’ 만큼의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아, 공자가 240년간의 역사를 간추려 ‘춘추(春秋)’라 하였으나, 이 240년 동안 일어난 군사, 외교 등의 사적은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과 같은 잠깐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는 말 위에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기록하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먹을 한 점 찍는 사이는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눈 한 번 깜박하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벌써 작은 옛날(小古), 작은 오늘(小今)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하나의 옛날이나 오늘은 또한 크게 눈 한 번 깜박하고 크게 숨 한 번 쉬는 사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찰나에 불과한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공을 세우겠다고 욕심을 부리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열하일기 상편, 일신수필 중에서

P.S.
2014년 1월 2일에 페이스북에 쓴 글을 재편집 및 보완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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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지난회 보기 

  1. 연재를 시작하며
  2. KTB 민영화, 그리고 한편의 詩
  3. 벤처캐피탈 입문
  4. 미뤄진 인생계획
  5. 영화투자의 시작
  6. 벤처투자의 기초
  7. 닷컴 그 늪에 빠지다.
  8. 글쓰기, 그리고 홍보팀으로 버려지다
  9. 벤처캐피탈과 사주
  10. 스타트업과 인센티브
  11. 네 번의 청혼, 한 번의 승낙
  12. 창업자의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
  13. 영화투자와 M&A의 갈림길에 서서
  14. 길거리 캐스팅, 그리고 IDG
  15. 벤처캐피탈의 자녀 금융교육법
  16. 두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무한 긍정의 힘
  17. 쇼트트랙 넘버3의 행운
  18. 어떻게 살 것인가? 
  19. 벤처캐피탈과 겸손 
  20. 초대받지 못한 파티, 그리고 쫄투의 인연
  21. 창업스쿨을 열다 – 린스타트업 방식의 접근법
  22. 잠깐 쉬어가자
  23. 발상의 전환과 실행력
  24. 멘토링의 즐거움, 그리고 번개장터 장영석
  25. 사업계획서 작성, 모방과 훔치기
  26. 벤처캐피탈의 스타트업 위크엔드 기획자 참가기 (1/2)
  27. 벤처캐피탈의 스타트업 위크엔드 기획자 참가기 (2/2)
  28. 스타트업, 어떻게 마케팅 할 것인가?
  29. 왜 창업을 하는가?
  30. 不惑(불혹)의 벤처투자자들
  31. 스타트업 기업가치 협상의 함정
  32. 콜럼버스를 통해 배우는 기업가 정신
  33. 칭찬의 중요성
  34. 벤처캐피탈의 질적 역할에 대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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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KTB 네트워크에서 벤처캐피탈에 입문한 후 현재 코그니티브인베스트먼트를 설립 및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스타트업을 위한 고품격 투자상담 토크쇼 “쫄투! 쫄지말고 투자하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교육에 관심 많아 예비 창업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창업교육 프로그램인 “쫄지마! 창업스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그 동안 플래텀에 연재한 글과 새로운 창업이야기를 담은 ‘쫄지 말고 창업(이콘출판)’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벤처캐피탈, 창업, 스타트업, 기업가정신 등에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론 그쪽 분야를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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