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나의 연재는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더 된 2003년 7월 17일 남도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마음이 갑갑하던 시절, 머리 식히러 땅끝마을로 향하게 된 것이 처음을 장식했다. 그리고, 지금 이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여행을 떠날 때 화두는’ 나를 그냥 가만히 놔두라’는 것이었다. 그 때의 표현대로 한다면 다음과 같다.
방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읽었다. 까뮈의 ‘이방인’처럼 기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진 주인공 또는 ‘좀머씨’의 모습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에서의 주인공 같은 엉뚱한 생각과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보이는 모습, 그리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의 ‘한스’ 같은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자기 만의 숲을 꾸미려는 강석경의 ‘숲속의 방’ 같은 모습도 엿보였다. 그런데 원래 이기적이고 냉소적이고 불평 늘어놓기 좋아하는 모습, 그리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자신만의 숲을 꾸미려고 하는 모습, 이런 것들이 인간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우선 인간 본연이라 말하기 전에 나의 모습은 아닐까?
‘좀머씨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이 아직도 머리 속을 어지럽게 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무슨 말이지? 그래 이게 이번 여행의 화두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라고…”
모든 여행이 끝이 있듯 일년 동안 지속되었던 나의 연재도 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난 지금 서른 초반의 나로 돌아가 땅끝마을에 서 있다. 땅끝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하다. 애초에 이 화두는 답이 있는 것이었다. 난 땅끝에서 다시 나의 십년, 아니 평생을 살 화두를 찾았다. 그래서 이 연재를 시작할 때 갑갑했던 젊은 시절의 그 화두를 먼저 던졌고 그 마지막은 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11년을 묵혀온 그 마지막 이야기 이제 펼쳐 본다.
땅끝마을을 찾다
아침에 일찍 여관을 나섰다. 가랑비가 약간 흩날리고 있었다. 차를 몰고 땅끝 전망대로 향한다. 차 안에서는 Norah Jones의 ‘I’ve got to see you again’이 흘러나온다. 혼자 떠난 여행, 갑자기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는 노래가 흘러나오니 외롭다는 생각이 난다. 그리고, 지금 떠오른 보고 싶은 사람.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우산을 들고 땅끝 전망탑으로 올라갔다. 유난히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오르신다. 내가 열심히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시더니”역시 젊은 사람이 잘 오르네”하고 한 말씀 하신다. 그 말을 듣고 난 계단을 두 개씩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전망대에는 안개가 걷힐 기미가 안 보인다. 전망대 아래로 땅끝탑으로 가는 산책로가 나 있다. 산책로는 계단으로 아담하게 잘 꾸며놓았다. 제주도 신라호텔 산책로 같은 분위기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 곳을 한참 내려가니 뾰족한 땅끝탑이 우뚝 서있다. 천지에서부터 치달려온 백두대간의 숨찬 호흡을 길게 내쉬며 발을 멈추고 화룡점정 하듯 마지막 획을 찍는 곳. 그 곳에 도달한 것이다.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거기서 다시 달려 함경도 은성까지 이천리 그래서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였던가?
예전 백두산 천지에 올랐을 때 하늘빛인지 물빛인지 그 벅찬 감동에 한걸음에 치달려 천지물을 손으로 퍼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도 땅끝탑 아래로 달려 바위에 입맞춤 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몇 관광객이 있어 쑥스러워 한참을 망설이다 아래 바위로 내려가서 기어코 땅끝 바위에 입을 맞췄다.
땅끝에 가면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 것으로 생각했다. 각종 소개 책자마다 그 상징성을 많이 떠들고 있다. 난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땅끝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뒤돌아 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왔던 나의 인생에 쉼표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쉼표. 그래 여기서 한 템포 쉬고 다시 달리자. 이런 다짐을 하고 다시 전망탑으로 올라왔다. 상쾌한 아침공기가 머리를 시원하게 만든다.
대흥사와 운명같은 話頭(화두)
대흥사는 노령산맥의 마지막 기운이 해남에서 우뚝선 두륜산 아래 있는 명찰이다. 여기서 서산대사, 초의선사 같은 유명한 스님들이 많이 나왔고 그 고승들 만큼이나 다양한 얘기거리가 담겨 있었다.
대흥사(大興寺)는 대둔사(大鈍寺) 라고도 한다. 흥할 興과 둔할 鈍자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재밌는 것은 대흥사라고 했을 때는 쇠하고 대둔사라고 했을 때는 흥했다는 사실이라니. 요즘은 대흥사 라는 이름으로 더 불린다는 것 또한 재밌지 않은가?
대흥사 들어가는 진입로는 나무가 울창한 것이 지나쳐 터널 같은 분위기로 길을 뒤덮고 있었다. 울창한 터널 같은 도로를 달려 들어가면 대흥사가 나온다. 대흥사는 사천왕상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절처럼 사천왕 그림이 대신하고 있는 곳도 아니다. 연못가에서 여유를 즐기는 부처님의 모습이 사천왕문 양쪽에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 또한 색다른 재미가 아닌가.
천천히 걸어서 올라간다. 구름다리를 건너니 대웅전이 펼쳐진다. 대웅전 옆에는 아담한 4층 석탑이 지조를 지키듯 단아하게 서 있다. 그 석탑 앞쪽에 석탑 모양을 본 뜬 5층 철탑 모양의 것이 서 있다. 철문이 각 층을 닫고 있어 가까이 가서 철문을 열어보니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로 비슷하게 되었다. 소각로까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이 또한 이 절의 여유와 운치인가 보다.
대웅전을 나와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성보박물관으로 갔다. 서산대사의 유품들은 오른 쪽 청허당(淸虛堂)에 전시되어 있다. 거기서 이번 여행의 주제가 될 문구를 만나게 된다. 그 문구를 보고 난 잠시 숨이 멎었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팔십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고녀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본 것이지만 渠(거)는 도랑을 뜻한단다. 도랑이 나였고 내가 도랑이다. 도랑은 뭔가? 물이 흐르는 곳이 아니던가.
윗 말은 무아지경(無我之境)이란 얘기인가? 아니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란 얘기인가. 그 깊이와 뜻을 가늠할 순 없지만 어렴풋이 그 말이 풍기는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 문구가 내 인생 여행의 화두야. 세월의 덧없음과 무아지경의 경지, 그렇지만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모호함이 담겨 있는 문구. 서산대사의 내공이 느껴져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물은 흘러간다. 그 흘러감 속에 예전엔 저 물줄기, 저 도랑이 나이더니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내가 이미 흘러간 물줄기 같다. 앞 만 보고 치달려 온 인생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자 땅끝을 찾았고 땅끝에서 다시 재충전을 하고 올라오는 길에 과연 내가 쉼표를 제대로 찍고 온 것인지 되묻고 싶다.
세월은 흘러간다. 예전의 내가 나이고 앞으로의 내가 나이다. 때론 예전의 내가 나 아닐 수 있고 앞으로의 내가 나 아닐 수 있다. 결국엔 서로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어지럽다. 이런 혼돈을 느끼려고 땅끝으로 간 것이 아닌데 혼돈만 가득 안고 되돌아 온다. 이것 또한 수확인가? 어차피 세상은 혼돈인데, 혼돈되지 않은 것이 비정상 일텐데, 그 혼돈된 세상에 혼돈을 안고 가니 그게 정상 아닌가.
다시 화두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다음 여행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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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2월 1일부터 연재 되어온 저의 ‘쫄지마! 인생’을 애독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플래텀에 연재된 내용에 예전부터 써왔던 글들을 더해서 조만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예정입니다. 그 때도 많은 사랑 부탁 드립니다. 이희우 올림 (heewoo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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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를 시작하며
- KTB 민영화, 그리고 한편의 詩
- 벤처캐피탈 입문
- 미뤄진 인생계획
- 영화투자의 시작
- 벤처투자의 기초
- 닷컴 그 늪에 빠지다.
- 글쓰기, 그리고 홍보팀으로 버려지다
- 벤처캐피탈과 사주
- 스타트업과 인센티브
- 네 번의 청혼, 한 번의 승낙
- 창업자의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
- 영화투자와 M&A의 갈림길에 서서
- 길거리 캐스팅, 그리고 IDG
- 벤처캐피탈의 자녀 금융교육법
- 두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무한 긍정의 힘
- 쇼트트랙 넘버3의 행운
- 어떻게 살 것인가?
- 벤처캐피탈과 겸손
- 초대받지 못한 파티, 그리고 쫄투의 인연
- 창업스쿨을 열다 – 린스타트업 방식의 접근법
- 잠깐 쉬어가자
- 발상의 전환과 실행력
- 멘토링의 즐거움, 그리고 번개장터 장영석
- 사업계획서 작성, 모방과 훔치기
- 벤처캐피탈의 스타트업 위크엔드 기획자 참가기 (1/2)
- 벤처캐피탈의 스타트업 위크엔드 기획자 참가기 (2/2)
- 스타트업, 어떻게 마케팅 할 것인가?
- 왜 창업을 하는가?
- 不惑(불혹)의 벤처투자자들
- 스타트업 기업가치 협상의 함정
- 콜럼버스를 통해 배우는 기업가 정신
- 칭찬의 중요성
- 벤처캐피탈의 질적 역할에 대한 반성
- 인생 40대, 다시 디지털 노마드 정신이다
-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와 인생
- 까여도 인연이면 만나게 된다 – 코코네 투자 뒷 이야기
- 사업 아이디어와 시장기회 사이에서
- 스타트업의 투자유치법
-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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